2016 인문사회부문 수상자 

권헌익


약력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사
미국 미시간 대학교 학사(정치학)
영국 케임브릿지대학교 석사(사회인류학)
영국 케임브릿지대학교 박사(사회인류학)
맨체스터대학교 사회인류학과 조교수
케임브릿지대학교 사회인류학과 에반스 펠로우
에딘버러대학교 사회인류학과 조교수, 부교수
런던정경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케임브릿지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초빙교수


수상이유


권헌익 교수는 한반도 분단의 과거와 탈분단의 미래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하여, 아시아의 탈사회주의 과정에 대한 비교로 연구 범위를 넓히고 있는 탁월한 인류학자다. 그는 냉전사 및 글로벌 현대사에서는 물론, 외교사와 전쟁사 등의 사회과학 분야, 아시아학과 유럽학 등의 지역연구 분야에서도 널리 인정받는 명저를 다수 출간한 바 있다. 베트남 현지조사를 통해 저술한 After the Massacre(2006, 『학살, 그 이후』)는 인류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저술상인 클리포드 기어츠상을 수상했고, 그의 또 다른 저술 Ghosts of War in Vietnam(2008,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은 미국아시아학회의 조지 카힌상을 수상하였다. 이 밖에도 권 교수는 아시아의 탈사회주의 경험을 분석한 The Other Cold War(2010, 『또 하나의 냉전』)와 북한 독재정권의 3대 세습을 인류학적으로 해석한 North Korea: Beyond Charismatic Politics(정병호 공저, 2012, 『극장국가 북한』)를 비롯하여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권 교수는 실증적인 현장 연구와 창의적인 이론 연구를 통해 세계 인류학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글로벌냉전을 역사인류학적으로 접근하면서 냉전사를 글로벌 역사 속에서 새로이 조명한 바 있다. 이는 유럽 중심의 제국 체제에서 미소 중심의 냉전 체제로 국제질서가 전환하는 가운데 '문화적 다원주의'나 '문화 상대주의' 등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재구성되었는가를 보여준 연구 성과다. 또한 현재 그가 진행하고 있는 아시아 사회와 정치에 대한 연구는 현대 인류학의 이론적 논의를 매크로히스토리의 현장에서 재고하는 것이기에 앞으로의 성과를 더욱 크게 기대하고 있다.


수상소감


먼저 이 자리에 와주신 여러분들 그리고 오늘 이런 자리를 가능하게 해주신 경암 송금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자서전을 읽고 '아, 정말 자갈밭을 갈고 닦아서 옥토로 만드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 하고 감명 받았습니다.


저는 인류학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인데, 현대 인류학도 선생님의 여정과 흡사하게 낯선 곳, 세간 사람들의 왕래가 없고 관심도 없는 투박한 곳에서 그곳의 고유하고 빛나는 삶의 모습을 찾는 학문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렇게 갈고 닦다가 어느 순간 지극히 고유하고 지극히 평범함 속에서 인류보편의 모습을 발견하고 경이로워 할 수도 있는, 현대사회과학에서 그 자체가 보석 같은 학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직접 경암선생님을 뵙게 되니 저 역시 화전민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자서전에서 닥치는대로 살아오셨다 했는데, 저 역시 닥치는대로 살아왔습니다. 처음 찾아나선 낮선 곳은 시베리아 대륙의 동쪽 끝자락, 수렵유목민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농경문화와 산업문화가 생경한 곳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정치적 환경 또한 당시 우리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때는 소련이라는 제국이 아직 존재했을 때이고 그들이 이끄는 국제사회주의연맹체도 물론 와해 중이기는 했으나 명목상 존재했을 때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의 낮선 면들을 한꺼번에 대면했던 적이 있습니다. 1989년 1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이전처럼 KGB에서 저를 담당했던 사무관이 무궤도 차를 타고 제가 묵고 있던 유목캠프에 방문했더랬습니다.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텐트 안에서 자리를 같이 했는데 그날은 좀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 누굴 만났느냐, 군사통제지역 근처로 혹시 가지않았느냐 등등을 물어봤을텐데, 그 날은 권련을 연달아 피우면서 한참 말이 없다가 갑자기 최근의 베를린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한숨을 내쉬면서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 것 같냐고도 물었습니다.

그를 배웅하고 난 뒤 개들 밥을 주고 오후 늦게 근처 개울에 쳐놓은 그물을 확인하러 갔습니다. 잡힌 연어들을 걷어내고 캠프로 돌아오는데 아침부터 심상치 않던 날씨가 아니나 다를까 돌변해서 엄청난 눈보라가 시작했습니다. 나의 발자국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근처 나무들도 다 달라 보여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고 결국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다 지쳐서 쓰러졌던 모양입니다. 굉장히 추운 날이었습니다. 꿈에 어릴 적 그림에서 봤던 산신령처럼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가 보이는데 그 수염에 얼굴이 간지러웠습니다. 눈을 부스스 떠보니 하얀 털의 순록 한마리가 제 얼굴에 입과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순록 이름이 그쪽 원주민 말로 흰돌까였는데, 얼마 후 다리가 골절되어 어쩔 수 없이 잡아서 제가 요리를 했어야 했는데, 그 때 마음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그렇게 거기서 얼어죽지 않고 살아나와, 이후 1989년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고 글을 써왔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와는 다른 저 철의 장막 건너편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라는 아주 기초적인 호기심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왜 장막은 지구의 한 쪽에서는 무너지는데 다른 곳에서는 없어지지 않는가 질문을 해야했습니다. 더하여 냉전이라 부르는 지구적 정치형태가 왜 어느 곳에서는 평화롭게, 다른 곳에서는 전혀 평화롭지 않게 전혀 다른 두 얼굴을 가지게 되었는가 질문도 해야했습니다. 여기 부산은 한국전쟁의 혼란 중에 고향을 등지고 피난와서 정착하신 분들이 특히 많은데, 이들 이산가족들에게 도시를 가로지르는 눈에 보이는 그런 장막보다는 가족과 친족의 친밀한 관계 안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 만큼 더 현실적인 장막이 있습니다. 그래서 냉전이란 것을 글로벌 영역에서 비교사의 주제로서 이해하지만, 동시에 국가들 간의 관계 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영역에서 인간의 관계의 문제로 이해하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한국인에게 지극히 익숙한 주제들인데, 이를 유럽과 서양의 경험이 중심인 냉전 담론에서 의미있는 주제로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아가 국가와 개인 중심의 시각이 익숙한 현대사회이론에서, 가족과 공동체의 관계를 중심에 두고 현대사의 인간의 조건을 보편 언어로 논하는 것 역시 쉽지는 않은 작업입니다. 이렇게 이론과 현상에 일정한 괴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현상을 두고 이론의 언어에 성급하게 비판을 제기하긴 싫습니다. 이런 쉬운 방법보다는 오히려 현대사회이론의 고전적 언어를 좀 더 상세히 애정을 갖고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 숨겨진, 현대에 구속되지 않는 보다 넓은 지평의 언어를 찾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1989년 겨울, 저를 눈폭풍에서 살아나게 한 것이 반드시 흰돌까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제가 처음 냉전의 장벽을 자진해서 넘었을 때, 한국전쟁 때 모진 고생을 하신 저의 어머니께서 몹시 불안해 하셨습니다. 지병인 심장병도 그때 더 나빠지고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시면서 이 땅의 여러 신령들에게 기원도 많이 하셨습니다. 당신의 그런 마음과 실천이 그날 그 사슴이 쓰러져있는 저에게 호기심을 갖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인류학은 냉정하고 실재적인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 현실이 관계의 현실이기 때문에 그 현실 속에 때론 눈에 보이는 실재를 넘어서는 또 다른 실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재를 넘어서는 실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적이고 윤리적 존재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경암재단의 오늘 이 상을 이 때까지의 업적에 대한 칭찬이 아니고, 앞으로 더 정진·매진하라, 더 자유롭고 철저하게 인간의 조건에 대하여 사유하라는 격려와 가르침으로 받습니다.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이 땅에 정신을 두고 세계의 역사를 끌어안으며 우리 모두가 처한 역사적 조건을 보다 더 명료하고 보다 더 적실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이에 보답할 것을 약속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