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인문사회부문 수상자
김우창
약력
서울대학교 학사(정치학과, 영문학과)
미국 코넬대학 석사(영문학)
미국 하버드대학교 박사(문학박사)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전임강사
미국 버팔로 뉴욕주립대학교 미국학과 조교수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이화여대 석좌교수
고려대학교 명예 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제3회 서울국제문학포럼 조직위원장
수상이유
김우창 교수는 문학, 철학, 사상, 예술, 미학에 시사적 현안 문제까지 아우르는 통합적 인문학자이다. 그는 문학을 넘어서서 인문학 그리고 인문학을 넘어서 사회와 인간 전반을 성찰해 온 한국의 대표적 르네상스형 학자다. 김 교수는 사실중심, 포괄적 이해, 상호작용의 가능성, 열린 감성, 철저한 사고, 정확한 언어 구사라는 학문적 덕목에 충실한 학자이다. 한 문학평론가의 말대로 그는 "현대 한국문화를 구성하는 가장 창조적인 자산의 일부"이다. 이런 점에서 제11회 경암학술상 인문·사회 부문 수상자에 가장 부합하는 분으로 판단하였다. 김 교수는 자아의 내면성이 세계와 환경에 어떻게 결합하고 확장되는지, 그 속에서 인간은 세계에 의해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천착하였다. 다음과 같은 김 교수의 말에는 이러한 생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참으로 의미 있게 살고자 할 때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양심의 소리이지요. 내면성을 통한 개인의 새로운 반성 없이는 사회의 윤리가 제대로 된 상태에 있을 수 없습니다." 김 교수는 사실중심, 포괄적 이해, 상호작용의 가능성, 열린 감성, 철저한 사고, 정확한 언어 구사라는 학문적 덕목에 충실한 학자이다. 한 문학평론가의 말대로 그는 "현대 한국문화를 구성하는 가장 창조적인 자산의 일부"이다. 이런 점에서 제11회 경암학술상 인문·사회 부문 수상자에 가장 부합하는 분으로 판단하였다.
수상소감
상을 주시기로 결정하신데 대하여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상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상을 받게 되어서 송구스럽습니다.
좋고 나쁜 일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 가운데 문화 건축의 실험도 일어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실험들로부터 보다 큰 조화와 창조적 도약을 아우르는 학문과 문화가 이루어질 것을 희망해 봅니다. 그때 단편적 인상을 기술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던 저의 저술 같은 것을 넘어, 커다란 창조적 저작물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현실의 삶과는 달리 예술 활동이나 학문적 저술은 그 나름의 사고의 공간이나 상상의 공간을 가지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저의 저술활동을 되돌아 볼 때, 그 단편적이고 산만한 성격을 문제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쓰게 된 글들의 성격, 사회, 정치 상황 그리고 우리 사회가 처했던 문화적 혼란.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변호를 해봅니다.
자연과학의 학문적 진전과 관련하여,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있고 또 그것의 변화에 대한 관찰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문화적 사고에도, 그에 비슷한 패러다임이 있고 그 전환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대적 분위기(climate of opinion)"나 "문화의 양식"이나 "인식의 체제(에피스테메)" 또는 개념이나 생각을 구성하는 이념의 인자(因子)로서의 "밈 (meme, mememe)" - 이러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관찰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로 하여 문화에는 상징적 일관성이 생겨납니다. 우리의 현대성의 경험은 이러한 문화적 총체성이 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보다 큰 문화의 총체성에 이르는 준비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의 많은 일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지 않나 합니다. 그러나 패러다임이 분명치 않는 경우라도, 주어진 과제를 조금씩.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데에 그 나름의 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사고는 사회적 상징체계의 통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어떤 경우에나 지나치게 완전한 문화의 전체성은 삶의 현실에 어긋나는 인식의 체계, "무쇠의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문화는 창조적 동력에 의하여, 스스로의 온전함을 유지하면서 그와 동시에 변화해가는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의 일관성이 파괴된 곳에서 개인의 삶은 총체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회복하는 작업은 주어진 대로의 삶을 사는 개인의 삶에 의하여 매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은 개체를 초월하는 창조적 힘의 담지자이기도 합니다. 개체적 삶은 삶이 일어나는 시점(時點)이고 지점(支點)입니다.
사람과 세계와의 의미 있는 관계가 상징체계와 그 안의 상징들을 통하여 맺어지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관계의 지주가 되는 것이 개인의 삶. 감각과 감정 그리고 사고로 이루어지는 개인의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모든 체제는 일단 이 지점을 통하여 검증된다고 하겠습니다. 문학이 하는 일은 이 지점에서 일어나는 삶을 포착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나는 농담 삼아 소설가는 사회학의 현장조사원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소설은 개인들의 삶의 이야기를 펼쳐냅니다. 이 삶은 이야기 속에서 일정한 의미 구성체가 됩니다. 사회과학이 하는 것은 이 심미적, 내면적 구성체를, 보다 큰 구성체 또는 외면적인 구성체의 틀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의 삶은 사회적인 틀, 사회과학적인 틀로 유형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개체적인 삶은 그것을 넘어가는 체험적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어떻게 보면, 개체적인 삶에 더 직접적으로 열려 있는 것이 시라고 하겠습니다. 감각과 감정은 삶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재로 하지 않는 시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시는 개인의 삶을 넘어가는 형상에 열려 있습니다. 시가 보다 형식적인 요소. 언어의 미학을 떠나기 어려운 것도 여기에 관련된다고 하겠습니다. 감각과 지각 체험에 닿아 있으면서, 그것을 형상적으로 승화하는 것이 시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제가 학문적 전문 영역을 벗어나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주로 문학평론의 분야, 그것도 대체로는 시에 대한 비평에서입니다. 평론은 작품에 기식하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비평문은 대체로 잡지사의 요청에 의하여 쓰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쓰인 글들의 단편적 성격은 이런 사정에도 관계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작품을 두고 쓰게 되는 평문은, 그 소재가 시이든지 아니면 이야기이든지, 그것을 산문으로, 그것도 논리적으로 펼쳐 나가야 합니다. 시는 그 나름의 감정의 체제를 가지고 있고 형식과 리듬의 관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시작과 전개와 종결이 다른 형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사(敍事)는 일정한 이야기의 구조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평론이하는 일의 하나는 이 구조를 밝혀내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민담 연구가 블라디미르 프롭의 저서에 "민담(民譚)의 형태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민담에는 5개의 구성요소, 서사전개의 기능에 관계된 31개의 기능적 요소, 7개나 8개의 한정된 플롯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서사 장르에도 대체로는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사의 구성을 밝혀내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것을 이념적으로 분석하여 거기에서 의미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에서 민족, 민주, 계급, 불평등, 사회정의, 발전, 역사 등등의 집단적 움직임을 말하는 단어들이 중심 개념이 됩니다. 제국주의, 인종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성 차별 등도 그러한 개념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문학작품의 의의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설명으로 환원된다면, 작품의 재미는 증발해 버린다고 할 것입니다. 평론이 이야기를 사회적 또는 형식적 구조로 환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경우에도 필요한 것은 구조의 흐름을 자세히 추적하는 일입니다. 이때 드러나는 것은 비슷한 흐름 속에도 우여곡절이 있고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삶의 궤적도 하나로 환원하여 보면, 얼마나 단순합니까. 생로병사(生老病死)는 그 큰 궤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개체적인 삶은 또한 얼마나 서로 다릅니까. 모든 개체는, 일단 "유일자(唯一者)"라고할 수 있습니다. 그의 유일함은 달리 설명되지 않습니다.
문학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지난 5월에 미국의 여권운동가 글로리어 스타이넘이 다른 여성 30여 명과 함께 북한에 갔다가, 휴전선을 경유하여 남으로 내려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후 미국의 뉴요커지에는 곧 출간될 자서전과 관련하여 스타이넘에 대한 글이 실렸습니다. 여기에 나온 일화에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대학 일학년 봄 지질학 시간에 주변의 계곡으로 현장답사를 갔습니다. 아스팔트길로 올라온 거북이를 보고, 스타이넘은 거북을 구해주려는 의도에서 거북을 강물에다 밀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때 마침 이것을 본 인솔하던 교수가 "뭍에 올라와 알을 낳으려는 것을 막았으니, 이제 몇 달이 더 있어야 알을 낳게 되겠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스타이넘에게 "거북에게 물어 보라"는 삶의 한 지표가 되었습니다. 사회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살아본 당신이 이야기 하세요. 당신이 전문갑니다." -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문학은 거북의 사정을 참조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해내고자 하는 인간 활동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개인의 사연을 듣고 그 진실에 공감하는 것일까요. 사람에게는 공감의 능력이 있고 또 공감을 직접적으로 매개하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한다면, 사람의 지능에는 모든 사물 존재에 일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고를 통해서 일반화하는 것은 단순한 연역과 추리의 결과가 아니고 마음과 존재가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학자 로저 펜로즈가 자신의 수학적 체험을 말하면서, 그에게 수학적 직관은 대체로 시각적으로 오고 이것을 그래프로 표현하는 것이 제일 직접적이고 편한 것인데, 이것을 수식으로 풀어나가는 것은 지겨운 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쓴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시적 직관은 구체적 사물 지각과 보편적 존재 직관이 부분적으로나마 일치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제 환상적인 이야기를 하나 함으로써 이 이야기를 끝내고자 합니다. 최근 저는 김종영 선생의 조각을 이리저리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시서화 삼절(三絶)의 예술가입니다. 그의 서예 작품에 삼국유사에 나오는 다음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당나라 황제가 연못을 팠는데 달빛이 밝을 때면 연못 가운데 사자 모습의 바위, 바위틈에 꽃이 핀 산이 비쳤습니다. 황제가 화공에게 그 모습을 그리도록 하고는 사신을 보내어 그 산을 찾게 하였습니다. 사신은 우리나라의 창원 백월상(白月山)에 이르러 그 산을 발견하였습니다. 사신은 확인을 위하여 자신의 신발을 바위 위에다 걸어 놓고 당나라로 돌아갔는데, 황제의 연못에 이 신발이 걸려 있는 바위까지 포함해서 백월산의 광경이 그대로 비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서정주 선생의 시에도 나옵니다. 이 환상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자연의 넓은 지면(地面)에 일치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우화가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그 매력의 일부가 아닌가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직관을 이론으로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이론은 지적인 요구이기도 하고 현실 정책의 구상에도 필요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미 현실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시도들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도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문화의 전체성을 향하는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또 하나 경험적 현실은 그러한 이념들에 대하여 시금석이 됩니다. 이러한 시험의 바탕이 되는 것은 마음의 공간입니다. 이 마음은 말하자면, 생물학 실험에 사용하는 페트리 접시와 같습니다. 거기에서 개체적 실존의 진실과 보편적 전체의 화합이 실험됩니다.
좋고 나쁜 일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 가운데 문화 건축의 실험도 일어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실험들로부터 보다 큰 조화와 창조적 도약을 아우르는 학문과 문화가 이루어질 것을 희망해 봅니다. 그때 단편적 인상을 기술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던 저의 저술 같은 것을 넘어, 커다란 창조적 저작물들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