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ureate in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2012 인문사회부문 수상자 故 이정식 


약력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학사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석사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박사
Instructor, University of Colorado
Instructor, Dartmouth College
University of Pennsylvania 교수
Director, Anspach Institute on Diplomacy and Foreign Affairs, University of Pennsylvania Chairman, Graduate Program in International Relations, University of Pennsylvania
연세대학교 용재 석좌교수
경희대학교 석학교수


수상이유


이정식 교수는 1961년 버클리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38년간 펜실베니아 대학교 정치학과교수로 재직하면서 탁월한 연구업적을 통해 명실공히 현대 한국정치의 연구의 대가로서 평가받고 있는 세계적인 정치학자이다.이정식 교수는 2000-2001년에는 연세대 용재 석좌교수로 국내에서 활동하였으며, 2003년부터는 경희대 석학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은 물론 활발한 저술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최근 10년간『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등 10권의 저서를 냈으며, 2012년 올해에도 『Park Chung Hee: From Poverty to Power』및 『21세기 다시 보는 해방후사』등 2권을 저서를 발간하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연구성과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첫째, 이 교수는 북한 정치의 역사적 기반을 밝히는 결정적인 많은 연구업적을 내었다. 특히, 1973년 스칼라피노(Robert A. Scalapino) 교수와 함께 발간한 『Communism in Korea』라는 저서는 미국정치학회가 선정한 우드로 윌슨 상을 수상하였는데, 동양계 정치학자로서 이 상을 수상한 사람은 이 교수가 유일하다.둘째, 이 교수는 지난 반세기동안 현대한국정치의 역사적 기반을 밝히는 실증적인 연구를 수행해 오면서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낸 정치학계의 대표적인 석학이다. 박사학위논문인 『The Politics of Korean Nationalism』을 시작으로 평생에 걸쳐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남북분단, 대한민국의 기원 등에 대한 저술과 아울러 이승만, 서재필, 여운형, 김규식, 박정희 등 한국현대사의 중심인물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여 국내외 정치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셋째, 한국정치의 연구에 있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이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한일관계사, 만주지역 중국공산주의운동사,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한 탁월한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저서와 논문들은 영어, 일본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동아시아 국제정치 연구의 고전이 되고 있다.이정식 교수는 2000-2001년에는 연세대 용재 석좌교수로 국내에서 활동하였으며, 2003년부터는 경희대 석학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은 물론 활발한 저술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최근 10년간『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등 10권의 저서를 냈으며, 2012년 올해에도 『Park Chung Hee: From Poverty to Power』및 『21세기 다시 보는 해방후사』등 2권을 저서를 발간하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연구성과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수상소감


지금 저의 심경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저 감개무량합니다.


1919년에 3ㆍ1운동이 일어나기 전의 일인데, 상하이에서 여운영(呂運亨)씨 등 몇몇 분이 김규식(金奎植) 선생을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로 보내기로 정했을 때 여비(旅費)와 활동비가 필요해서 장덕수(張德秀)씨가 부산에 파송되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곧장 백산학회(白山商會)의 안희제(安熙濟) 선생을 찾아가서 2,000원을 받아가 김기식(金奎植)씨를 파리로 보내는 여비의 일부로 충당했습니다.

안희제(安熙濟) 선생은 중외일보(中外日報)사장으로도 유명하시지만 교육가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알려져 있는 분인데 민족 자본의 육성에도 큰 공로가 있으시고 기미육영회라는 장학회도 설립했었습니다. 결국 그는 독립운동 때문에 옥중에서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셨지요.

경암(耕岩) 선생님의 고향 철마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의성군 분이었습니다. 두 분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교육에 헌신(獻身)하신 점에서도 많이 닮았습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재단으로부터 왜 다양한 학술 분야 중 한국현대사를 택해 연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으면 덧붙여 말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제가 한국현대사를 연구하게 된 것은 Robert A. Scalapino 교수의 조교(助敎)로 채용되어 Berkeley에 있는 University of California 정치학과에서 Ph.D. 공부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종용으로 한국독립운동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그것이 저의 한국현대사의 입문과정(入門課程)이었습니다. 그때가 1957년이었는데 이미 5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가버렸습니다. 스칼라피노 교수도 금년에 92세로 타계(他界)하셨습니다.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는 과정에는 일화가 너무나 많습니다.

1957년은 자유당 말기로 한국현대사 연구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황무지였습니다. 사학자(史學者)들은 “현대(現代)”를 역사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접근하지 않았고, 정치학을 포함한 사회과학 부문의 학자들은 “지나간 시대”의 일인지라 관심이 없었습니다.

판문점 회담이 끝난 것이 1953년 7월이었으니 아직 학자들이 자리 잡고 공부를 시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불순분자(不純分子)들이나 할 일이지 학자들이 할 일이 아니었고, 공산주의는 금기(禁忌)의 대상이지 연구의 대상이 아닐 만큼 그 당시의 분위기라는 것이 학문을 추구하는데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Tchaikovsky는 러시아 사람이어서 빨갱이로 취급되었지요. 한동안 임시수도(臨時首都) 부산(釜山)의 다방(茶房)에서는 챠이코브스키의 음악을 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학생들이 유명한 사회학자 Max Weber의 책을 가지고 다니면 “막스”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서(Marx 맑스와 발음이 비슷하니까요.) 형사들이 공산주의를 공부하는 줄 알고서 체포해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Scalapino교수와 공저로 “한국공산주의 운동의 기원(起源)이란 논문을 발표한 것이 1960년 11월과 1961년 2월이었고, 그것이 번역되어 출판된 것이 1961년 3월이었는데 이미 4.19가 일어난 후였지만 치안당국(治安當局)의 주목(注目)을 받게 되었습니다.

형사(刑事)들은 저에게 왜 공산주의사(共産主義史)를 연구하느냐, 한국공산주의 운동이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의 파생(派生)이었다는 주장은 공산운동을 부추기고, 미화(美化)하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냐, 즉 반공법(反共法)에 저촉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빨갱이가 아니면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고, 또 논문을 쓰기까지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등 많은 의문을 품고서 저를 미행하며 사찰했다고 합니다. Scalapino 교수는 미국인이니 문초(問招)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이정식이라는 교수를 찾았는데 다행히 그들이 찾아간 것은 제가 아니라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동국대학(東國大學)의 이정식(李廷植)교수이었습니다.

그분과 저는 인적사항(人的事項)은 90%가 같았습니다. 동성동명(同姓同名)인데다, 같은 정치학자, 계급은 조교수이었고. 사상계(思想界) 잡지를 위시해서 각종 잡지에 정치에 관한 제목의 글들을 기고(寄稿)했는데 생년월일(生年月日)도 보면 같은 해, 같은 달 출생이어서 착각(錯覺)을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정식의 “정”자도 너무나 비슷해서 한자(漢字)로 써도 친척들마저도 혼동을 하곤 했으니까요.

착각을 한 것은 형사들뿐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동경(東京)에서 저의 조선노동당 소사(小史)가 번역되어 발행되었을 때(1980년) 맨 뒷장에 저자소개란에 저와 동국대(東國大) 이정식교수의 약력이 뒤범벅되어 나왔었습니다. 제가 전남 영광(全南靈光) 출신으로 서울대 문리과대학을 졸업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덕에 서울대 출신이 되었는데 어떤 젊은이가 와서 자기가 문리대(文理大) 정치학과(政治學科) 출신이어서 저의 후배(後輩)라고 인사를 하더군요. 갑자기 출세를 해서 으쓱했었습니다.

그 후에, 1973년에 Communism in Korea가 발간되었는데 국내에서는 물론 금서(禁書)취급을 받았습니다. 한국 전쟁 후에 북한쪽의 부흥이 더 빨랐고 북한의 경제가 더 앞섰다는 말이 귀에 거슬려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보다도 북한의 김일성 수상(首相)은 가짜가 아니고 진짜라는 말을 받아드리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일성 위조론(僞造論)은 당시 정권의 공식 입장이었으니까요. 다만 당시의 정보당국에서는 두 권으로 된 그 책을 복사해서 직원들의 교육자료(敎育資料)로 쓰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복사본(複寫本)을 하나 주어서 소중(所重)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울과 부산의 USIS 도서관에는 한 권씩 비치되어 있어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읽기도 하고 복사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손때가 까마득하게 묻어 있더라고 Glenn Paige가 와서 전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김일성이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말을 들으면 흠칫하시는 분이 계실 터인데요, 가짜 김일성을 만들려면 주변의 중국사람, 한국 사람들 등 많은 상관(上官)들과 동료들까지 위조(僞造)해야 했는데, “과연 그럴 필요(必要)가 있었던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생각해보면 김일성의 진위(眞僞)를 충분히 가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80년대가 되어서 북한 간행물들의 열람이 허락되자 일부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우리 책은 급기(急機) 보수파 저작물(著作物)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들은 김일성 저작집이나 북한간행물을 읽어야 진짜 진보적 인텔리 구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이들의 책 같이 분석이나 해설의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정식은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 너는 과연 누구냐.고 묻는 분이 계시겠지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한 가지 일화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반세기 동안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쁜 일이 많았습니다.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받은 찬사(讚辭)들 중에 가장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 있는데 다음에 말씀 드릴 이장무 총장님의 말씀과 함께 카마타(鎌田光登)라는 분의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알지 못했던 저의 성향(性向)을 묘사해 주었기 때문에 아주 반갑게 그리고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저의 정체(正體)를 발견했다고 할까요.

Kamata Mitsuto씨는 과거에 동경신문(東京新聞)의 서울지국장으로 지낸 일이 있고 영어는 물론 한국어에도 능통(能通)한 분이었는데 아까 말씀드렸던 저의 조선노동당소사(朝鮮勞動黨小史, 영문책 Korean Workers’Party: A Short History)를 일어(日語)로 번역해 주었습니다. (Korea 評論社, 1980).

그리고 역자(譯者)후기(後記)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주었습니다.

“나는 과거에 이정식(李庭植)씨의 논문을 몇 개 번역한 일이 있으나 아직 면식(面識)은 없다. 이번에 이 책의 번역을 맡은 것은 그분이 쓴 <김규식의 생애> (1974) 때문이다.

나는 그 책을 읽고 감격한 일이 있는데 코리아 평론사(評論社)의 김삼규(金三奎)씨와 잡담(雜談)을 하던 중에 그때의 일이 언급되어 결국 이 책 소사(小史)의 번역을 종용(慫慂)받게 되었다.

<김규식의 생애>를 보면 해방된 조국에 돌아갔지만 통일을 염원하여 정치활동에 몸을 바친 끝에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韓國戰爭 當時 共産軍)에게 납치(拉致)되어 비참하게 일생을 마친 민족의 선각자(先覺者)를 애도(哀悼)하는 이정식씨의 민족애(民族愛)와 시정(詩情) [시적인 정취(情趣)]이 품겨 있다.

이 책에서도 그렇지만 이정식(李庭植)씨의 저서는 엄밀한 학문적 추구 속에 과거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여 (좌족으로 기우린) 항일투쟁에 분투(奮鬪)하다 중도(中途)에서 쓰러진 자들, 또는 실패(失敗)한자, 좌절(挫折)한 자들을 애처롭게 생각하는 (ito oshimi) 감을 느끼게 된다.

이 사람들은 북조선에서는 김일성 게리라 집단의 주류에서 밀려나와 (hagurete) 방계(傍系), 또는 사이비(似而非) 혁명가라는 딱지가 붙여졌고, 한국에서는 이단자(異端者) 취급을 받아왔다.

한국의 분단이 계속하는 한 망각의 저편에서 잊어질 운명에 있는 사람들이다. (p. 217. 조선노동당 소사) 이것이 그분의 글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도 그런 부류로 분류(分類)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암살되기 직전에는 박헌영 계열(系列)뿐만 아니라 소련군정과 대립(對立)이 되어서 여러 번 구타를 당하고, 주택(住宅)이 폭파(爆破)되는 사건까지 일어 나섰지요. 남쪽에서는 빨갱이라고, 지금의 말을 쓴다면 종북자(從北者)라고 해서 배척을 받아왔지요.

저의 여운형 전기(2008)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분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는 날 가시던 목적지는 미군정의 최고 민정장관이었고, 그날 모임의 목적은 몽양을 미군정의 한국인 민정장관으로 채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보다 더 큰 실권(實權)을 행사할 수 있는 민정장관을 만들어 보려던 것입니다. 미군정은 애초에는 그를 빨갱이, 아니면 사이비(似而非) 공산주의자로 보다가 나중에는 자기들의 편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저는 이처럼 독립운동에 헌신(獻身)했다가 고생 끝에 쓰러져 아무도 모르는 그늘에 묻힌 선열(先烈)들 중의 대소(大小)인물들에게 다문 얼마라도 각광을 비치게 한 것, 그리고 역사전 진상(眞相)을 올바르게 밝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학술상 위원장으로 계시는 이장무 총장님과 여러 전형위원님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바쁘신 중에서 이장무 총장께서는 저에게 서신을 주셨는데 그분의 말씀 중에 특히 저를 기쁘게 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저에게 주시는 경암학술상이 노학자(老學者)에게 주는 공로상(功勞賞)이 아니라 발랄(潑剌)하게 활약하는 학자들에게 주는 격려상(激勵賞)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지금까지 쌓아 온 업적(業績)을 치하(致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연구 과업을 잘 하라고 격려(激勵)하기 위해서 주시는 상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Pennsylvania 대학교에서 은퇴한 후(1999)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의 석좌교수로 지내면서 연구(硏究)에 전념(專念)할 수 있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21세기를 저의 수확기(收穫期)로 잡고 있습니다.

여기 나와 있는 프로그램에 2,000년 후에 출판한 책들이 7~8권 소개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누적해 온 자료들과 너무나 성숙(成熟)치 못한 저작물들을 종합하고 또 연구를 거듭하여 보다 더 성숙한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경희대학교의 조인원 총장이 현대사연구원을 설립하여 저를 적극 돕겠다고 해서 마음을 설레고 있습니다.

앞으로 경암상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경청(傾聽)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