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耕岩) 송금조(宋金祚) 선생

경암(耕岩) 송금조(宋金祚) 선생

1923년 경남 양산군 철마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역사적 격동기에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낸 선생은 약관의 나이 열입곱이 되던 1941년에 독립하여 사업의 길로 들어섰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 보겠다는 일념으로 사업에 매진하던 중, 1947년 경남약품을 설립하였다. 선생은 그 후 점차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간의 공적을 인정하여 선생에게 1986년에는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산업훈장과 국무총리 표창을, 2000년에는 사학을 육성한 공로로 봉황장을, 2002년에는 국민교육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아울러 선생은 2003년 부산대학교로부터 교육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해 대한민국 올해의 선행 10인 가운데 첫번째로 선정되었다.


선생은 2004년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초대이사장직을 역임하였다.


경암 송금조 선생이 걸어온 길

 나의 삶을 돌이켜보면, 아무런 쓸모없는 자갈밭에서 돌멩이를 걷어내어 옥답을 일구는 과정과 다름없었다. 이런 나에게 소설가 요산(樂山) 김정한 선생은 '바위밭을 경작한 사람'이란 뜻으로 경암(耕岩)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역경 속에서도 누구를 탓하지 않고 묵묵히 쟁기를 끄는 황소처럼, 우직하고 고지식하게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오늘의 결실은 그렇게 해서 일궈놓은 옥답의 열매들이다.

오늘의 성취가 나의 생활신조인 근면검약의 결과였지만, 그 성취가 내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주변의 따뜻한 도움도 있었고, 때로는 운도 따랐다.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혀 허우적거리며 상심했을 때, 진정어린 격려를 아끼지 않은 분들이 있었다. 혼돈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할 때, 고삐를 다시 매도록 따끔한 충고와 채찍질을 주신 분들도 없지 않았다. 내게 경암이라는 아호를 지어준 요산 김정한 선생은 그 중의 한 분이다. 부산 토박이로서 국내 문단의 큰별로 남은 요산 선생은 미욱한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특히 경암이라는 아호는 그로부터 받은 가장 큰 가르침이자 선물이었다.

나는 광복 직후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창업한 약품도매상을 시작으로 미곡상, 정미소, 양조장, 플라스틱제조공장, 봉제공장, 수산물가공공장, 주방기기공장, 극장 등 실로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험난한 고비를 넘고 좌절을 겪으며 오늘의 성취를 이루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분야에 눈길을 돌릴 수 있었는지 스스로 의아해할 정도다. 밭이랑을 너무 자주 바꾼 셈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내 나름대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나와는 거의 동시대의 기업가로서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견인했던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현대의 정주영 회장에 비교하면, 나의 이런 모습들이 이 고랑에서 저 고랑으로 힘들게 옮겨가는 한 마리 개미의 종종걸음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 삶에 있어서 크게 후회하거나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다.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옥토를 일구었다는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는 확신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이제 인생의 만년에 접어든 요즘, 나는 대부분의 사업을 정리하고 교육문화보국의 일념으로 설립한 학교법인 태양학원과 경암교육문화재단을 통해, 우리나라의 교육과 문화 증진을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쏟고 있다. 교육과 문화의 뒷받침 없이는 사회와 국가의 진정한 발전을 도모하기 어렵다는 평소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어느덧 경암교육문화재단이 설립된 지도 13년이 흘렀다. 여기서 제정한 경암상은 우리나라의 학문과 문화 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전국 규모의 대표적인 학술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운 여건에서 출발한 학교법인 태양학원의 경혜여고도 당초의 설립 목적에 맞게 정상 궤도에 올라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 모두가 나에게는 정말로 보람되고 가슴 벅차다. 요즘 들어 삶의 보람과 긍지를 더더욱 느끼게 되는 이유다.

나는 대부분의 사업체가 고향 인근의 부산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부터 광복과 6.25 전란의 혼란기를 거쳐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 빠르게 진화하는 부산의 역동적인 모습을 빠짐없이 현장에서 지켜본 산증인으로서, 또한 부산이라는 지역적 배경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든든한 밑바탕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늘 부산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부산은 내 사업의 젖줄이었고, 부산의 발전은 나의 성취와 궤를 함께 했다.

이제 내 나이도 어느덧 망백(望百)이 지났다. 나이에 비해 아직도 비교적 건강한 편이라 활동은 가능하지만 기억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지나온 삶의 궤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의 치적을 내세우고 싶어서가 아니다. 빈약한 사회적 기반에서 역경에 굴하지 않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이룩한 나의 조그만 성취가,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다.

한편으로는, 국내 기부 사상 개인 기부로서는 당시에 최고액인 305억 원을 부산대의 반세기 숙원사업인 양산캠퍼스 부지대금으로 기부할 것을 약정하고 195억 원을 출연한 상태에서, 예기치 않게 부산대와 벌인 법적 공방에 대한 진실을 기록으로 남기고도 싶었다. 기부자가 피기부자로부터 명예를 손상 받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이는 앞으로 우리나라의 올바른 기부문화의 풍토 조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해본다.

나는 지나간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자체가 기쁘고 가슴 뿌듯하다.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지난 얘기들을 훌훌 털어놓으니 후련하기도 하다.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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